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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2. 업 소멸 위해 염불공덕 쌓아야
 관리자  | 2012·12·31 17:07 | HIT : 2,088 | VOTE : 178
  우리 중생들은 살아가면서 입만 때면 업(業)을 짓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업을 소멸하거나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업’이란 말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도 드문데 말이지요.
  자, 그러면 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뭐라고 합니까? “나는 왜 이리 전생에 지은 업이 많은 것일까?”, “업장이 얼마가 두텁길래 이리도 일이 안 풀리는 것일까?” 등과 같은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대체 업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업이라는 말의 어원이 본래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인데 이것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땅으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바로 업(業)자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업을 가장 알기 쉽게 얘기하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고 있는 일, 내가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업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하는 일을 물을 때 뭐라고 합니까? “네 직업이 무엇이냐?”라고 하지요. 이것도 결국은 현재 하는 일, 즉 업을 묻는 것입니다. “내 직업은 상업이다”,  또는 “농업이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업이지요. 그러나 그 이전에 했던 일거수일투족 행위 자체도 업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행동이나 대화중에서도 “그것은 업이 된다.”, “업 짓지 마라,”, “업이 두텁다.” 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업에 대해서 시원스레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어서 문자나 소리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업이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화를 내고 욕심을 내고 또 허망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묶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집착하게 될 때 마음은 더욱 굳고 단단해집니다. 이렇게 굳고 단단해질 때 마음에 부스러기가 생깁니다. 마치 우리가 오렌지를 손안에 꼭 쥘 때, 작은 물방울이 얼굴에 와서 닿는 것과 같이 그렇게 작은 부스러기가 생깁니다. 이렇게 작고 미세한 부스러기는 마치 아지랑이 같고 연기 같이 뿌옇다고나 할까요. 마음이 굳어져서 균열이 생긴 미세한 입자인 이것을 우리는 업(業)이라 하고, 경전에서는 형진(荊塵)이라 칭하고 범어(梵語)로는 ‘카르마’라 하며 학자들은 ‘오로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응염체(凝念體) 또는 염사체(念思體)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

  이와 같이 굳고 단단해진 마음, 집착에서 생긴 이 업은 색깔도 있고 냄새도 있지만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오신채나 육고기와 같은 것을 먹지 않고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고 계율이 청정하고 바르게 살면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실은 심안이겠지요.) 이 업은 사람마다 그 심성에 따라서 색깔과 냄새가 짙기도 하고 얕기도 합니다. 색깔이 짙을수록 음(-)기를 느끼기도 합니다. ‘유약자(柔弱者)는 생야(生也)하고 견강자(堅强者)는 사야(死也)니라.’(도덕경), 즉 부드럽고 연한 것은 삶을 의미하고 굳고 단단한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계율이 청정하여 연하고 부드럽고 밝을 때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모든 사물을 봅니다. 눈이 스스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눈을 통해서 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눈이 사물을 볼 때 그 현상에 대해서 마음은 움직이게 됩니다. 가령 사과를 봤을 때, 문득 ‘아, 사과로구나.’ 하는, 밖으로 하나의 경계가 생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저 사과는 후지사과로서 참 맛있겠다.’ 하는 분별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분별로부터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집착이 붙어 업을 쌓게 됩니다. 결국 업이라는 것은 한 생각에 의해 스스로 짓고 받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와 달리 선악시비를 누가 만들어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누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우리 목전에 선악과 시비가 왜 나타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선악의 원인은 우리가 일으키는 한 생각에 있습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 이것이 선악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선과 악으로 갈라질까요?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죄가 되는 순간이요, 그 다음에 착한 생각, 어진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복이 되는 순간입니다.
  아예 이 생각 자체를 끊어버리면 죄도 없고 복도 없습니다. 여기서 일어난 생각, 좋고 나쁜 생각 등 그 생각 자체를 ‘사업(思業)’이라고 합니다. 이 사업은 꺼 버리면 업이 되질 않는데, 이것을 마음속으로 결정지어 버리면 ‘작위업(作爲業)’ , 즉 ‘사업’이라고 합니다. 또 결정지어진 생각을 우리 몸뚱이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행위업(行爲業)’, 즉 ‘사기업’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통칭해 우리가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역해 말하면 이 사바세계에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일생동안 우리가 지은 업은 끝이 없지요.

  사람은 의도적으로 행동한 업의 주인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날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업이 사람을 높거나 낮게, 그리고 거룩하거나 천박하게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자아란 실재하지 않지만, 물질과 빗물질의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운동의 저변에 잠재된 업력의 흐름 때문에 생사윤회는 끝이 없습니다.
  ‘고통이나 그 조건(업)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해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과 체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작업인 수행을 지속해야 합니다. 바른 노력, 마음 집중, 마음 챙김으로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되, ‘싫다, 좋다’ 하는 분별의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량분별심이 약화되면 될수록 욕망의 사슬도 느슨해지고 행동반경도 그만큼 자유스러워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화내고 욕심내면서 쌓은 이 마음의 부스러기 때문에 이 세상과 동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긍정하는 마음으로 나를 낮추고 ‘나무 아미타불’을 수만 번 염송하면 마음이 움직여지고 공덕이 쌓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업장을 소멸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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